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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야스미 [기억 파단자] : 작가 소개 및 줄거리, 서평

by vaminglibrary 2025.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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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야스미의 기억 파단자
고바야시 야스미 [기억 파단자] / 아프로스 미디어

 

작가 소개 : 고바야시 야스미, 장르를 넘나드는 상상력의 작가

고바야시 야스미(小林泰三, 1962~2020)는 일본 SF 및 미스터리 문학계에서 특유의 독창성과 사유적 깊이로 자리매김한 작가이다. 의료공학을 전공한 이과적 배경과 철학에 대한 깊은 관심은 그의 작품 세계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 그는 단편부터 장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의 서사를 실험하면서도, 인간 존재의 경계와 의식의 불완전성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대표작으로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귀환』, 『Ω의 살인』, 『낙원에서의 살인』 등이 있으며, 특히 『기억 파단자(記憶破断者)』는 그의 후기작 중에서도 독자적 문학성과 철학적 사유가 절정에 이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줄거리 :  “기억이 없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

『기억 파단자』는 제목부터 독자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하다. 기억을 ‘파단(破断)’당한 자—즉, 어떤 이유에서든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야 하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단순한 기억상실증을 다룬 서사가 아니다. 기억이란 무엇이며, 인간은 기억을 통해 어떻게 ‘자기’를 구성하는가에 대한 실존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작중 주인공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른 채 병원에서 눈을 뜬다. 그는 의료진에 의해 ‘기억 파단자’라 불린다. 특정한 외상 때문이 아니라, 의도적이거나 혹은 시스템적으로 주기적인 기억 소거가 이루어진 상태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그는 단순한 환자가 아니라, ‘기억을 잃도록 조작당한 사람’이며, 더 나아가 사회 전반이 기억을 통제하는 구조 속에 있다는 사실을 점차 인식하게 된다. 읽는 내내 나는 불안했다. 왜냐하면 고바야시는 기억을 잃는다는 설정을 단지 미스터리의 장치로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당신은 지금까지의 자신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불현듯 낯선 현실 속 내게도 향하고 있었다.

기억과 정체성, 그리고 죄책감의 순환

이 소설의 가장 인상 깊은 지점은, 기억이 인간의 정체성과 도덕적 판단에 얼마나 결정적인 요소인지를 철저히 파헤친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기억을 잃은 채로도 일정한 윤리의식을 가지며, 자신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복원하려 애쓴다. 그러나 그가 마주하는 진실은 상상 이상으로 불편하다. 그는 과거에 어떤 끔찍한 행위에 연루되어 있었으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발적으로 기억을 지우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고바야시는 독자의 기대를 뒤엎는다. ‘기억을 되찾는 것’이 구원이나 진실의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고통의 재현이며, 때로는 인간 존재를 더 깊은 절망으로 끌어내린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그 기억을 직면하려 한다. 왜냐하면 고통의 기억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보여주는 이 '기억과 죄의 고리'는 단순히 주인공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작품 속 세계는 점차 확장되며, 기억의 통제와 삭제가 일상화된 사회 전체의 문제로 옮겨간다. 개인의 기억은 곧 사회적 통제의 도구가 되고, 이로 인해 인간은 점차 생각하지 않는 존재, 스스로를 설명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이는 디스토피아적 공포이자,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더 이상 낯설게 느낄 수 없는 현실이다.

언어로 구축된 미로, 그러나 빠져나올 수 없는 질문

고바야시 야스미의 문체는 간결하면서도 정밀하다. 『기억 파단자』는 복잡한 개념과 서사를 품고 있음에도, 문장 자체는 군더더기 없이 흐른다. 그러나 바로 그 단순함 속에 독자는 무력해진다. 왜냐하면 그는 독자를 정보의 홍수로 압도하기보다, 단 하나의 문장, 단 하나의 질문으로 계속 흔들기 때문이다. 예컨대, 주인공이 어느 순간 “이 감정이 나의 것일까?”라고 자문하는 장면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감정조차 기억의 산물이라면, 그리고 그 기억이 조작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참된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소설의 플롯 바깥으로 확장되어, 독자의 삶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일종의 미로다. 처음에는 ‘기억 상실의 비밀’이라는 미스터리를 따라가지만, 어느 순간 독자는 길을 잃는다. 그리고 그 미로의 출구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고바야시는 그 출구를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그 미로 속을 걷는 과정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를 결정하도록 만든다.

인간은 과거의 누적이 아니라, 기억을 선택하는 존재이다

『기억 파단자』는 단순한 SF도, 추리소설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자신을 이해하고 설명하는지를 묻는 철학적 고찰이며, 동시에 사회적 통제와 기술 문명의 그림자를 드러내는 통렬한 비판이다. 고바야시 야스미는 인간이 기억을 통해 어떻게 윤리적 존재로 서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기억이 조작되거나 상실될 때 인간성이 어떻게 위태로워지는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결국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귀결된다. “우리는 잊고 싶은 기억조차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는가?” 책장을 덮은 후에도 한동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그 이야기 너머에 있었던 질문들이었다. 내가 누구였는지를 결정짓는 것이 나의 행위인가, 나의 기억인가? 혹은, 내가 믿고 있는 기억은 진실한가? 『기억 파단자』는 그 질문을 던지고 떠난다. 답은 없다. 그러나 그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것—그 자체가 우리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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