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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등을 쓰다듬는 사람] : 조용한 위로

by vaminglibrary 2025. 4. 15.

김지연 등을 쓰다듬는 사람
김지연 [등을 쓰다듬는 사람]

 

1. 이상하게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

이 책을 처음 펼쳤을 때, 사실 기대보다는 호기심이 조금 더 컸다. ‘등을 쓰다듬는다’는 말이 좀 낯설고, 어쩐지 애틋하게 느껴져서. 그런데 몇 장 넘기지 않아 이상하게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 뭔가 말로 딱 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문장들 사이사이에 스며든 온기가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작가가 미술 비평가라 뭔가 대단히 냉철하고 분석적일 줄 알았는데, 제목만큼 참 따뜻한 시선의 책이라 편하게 읽혀졌다. 대단한 사건이 벌어지지도 않고, 아주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그 사람들의 말투나, 멈칫하는 마음 같은 게 자꾸 나를 붙잡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들 옆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2. 누구나 한 번쯤은 지고 사는 마음들

책 속 인물들은 다들 어딘가 조금씩 부서져 있다. 어떤 사람은 슬픔을 삼킨 채 살아가고, 또 어떤 이는 말 한마디 제대로 꺼내지 못한 채 혼자 아프다. 그런데 그게 아주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내 친구 같고, 어쩌면 내 이야기 같기도 했다. 사람들은 흔히 큰 아픔이나 상처에만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만, 이 책은 아주 작은 틈도 조심스럽게 들여다본다. 말로 꺼내기엔 너무 사소하고, 그래서 더 오래 묻혀 있던 감정들을. 그게 참 고마웠다. 누가 나한테 ‘그 정도는 다들 참고 살아’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래도 힘들었겠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3. 조용하지만 깊게 안아주는 글

김지연 작가의 글은 크고 화려한 장면보다 조용한 눈빛 같은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더 진하게 남는다. 일부러 울리려는 문장도 아니고, 교훈을 던지려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울컥한다. 어쩌면 나도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쓸쓸함이, 그 문장들에 조용히 반응한 건지도 모르겠다. 문장을 읽고 있다 보면 자꾸만 누군가의 등이 떠오른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말없이 안아주던 엄마, 혹은 그냥 지나쳤지만 괜히 마음에 걸렸던 누군가. 그리고 그 모든 등을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 등은 지금 누가 쓰다듬어 주고 있을까’ 하는 질문에 다다른다. 그 질문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이미 충분히 큰 울림을 준다.

 

4.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은 책

이 책을 덮고 나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냥 기분이 이상했다. 감정이 북받치는 것도 아니고, 눈물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뭉클했다. 그리고 이상하게, 자꾸 어떤 사람 얼굴이 떠올랐다. ‘이 책을 그 사람한테 주고 싶다’는 생각이 났다. 뭔가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이 책이 내 마음을 대신 전해줄 것 같아서. 다정하다는 말보다, 그냥 조용히 등을 한 번 쓰다듬어주는 손길 같은 글. 그런 위로를 오랜만에 느꼈다.

 

5. 당신도 누군가의 등을 쓰다듬고 있기를

『등을 쓰다듬는 사람』은 말없이 곁에 있어주는 이야기다. 위로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전부터, 이미 마음을 만지는 책.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자주 무심히 지나치는지를 떠올리게 하고, 말보다 더 오래 남는 손길이 있다는 걸 다시 깨닫게 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도, 누군가의 등을 조용히 쓰다듬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혹은 누군가가 당신의 등을 다정히 쓸어주는 중이기를 바란다. 그런 마음이 이 책에는 담겨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조용히, 그러나 꼭 누군가에게 건네고 싶다.

 

새겨진 문장

_p. 13

비평이란 칼을 들어 대상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비평은 의미를 발견하고 드러내는 일이다. 날 선 칼보다는 구체적인 사랑의 눈이 더 필요하다. 물론 번역의 과정처럼 전달되는 사이에 탈락하는 것들이 있다. 아직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은 모호한 개념, 굳이 드러낼 필요 없지만 당연히 존재하는 작가의 노고 같은 것들은 작품과 나 사이에서만 영원히 간직하는 비밀이 되기도 한다. 글자를 모아 원고를 보내고 마침내 혼자 남았을 때, 나만 아는 그림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_p. 23

매일 걷고 페이지를 넘기면서, 작은 반복으로도 어느 날 훌쩍 먼 곳에 도착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배웠다. 세상에 안착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는 사람에게 반복되는 일상은 버텨내야 할 무게인 동시에 삶을 현실에 붙잡아 주며 지키는 중력이다. 그 중력이 시간을 견디고 나를 숨 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