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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 크라우스 [사랑의 역사] : 가장 완벽한 사랑의 서사

by vaminglibrary 2025. 4. 16.

니콜 크라우스 사랑의 역사
니콜 크라우스 [사랑의 역사]

 

 

 

내가 사랑하는 고명제시인이 극찬한 책이니 안 읽어볼 수 없다. 역시 결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의 추천이라 그런지 같은 결의 감동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읽어본 책 중 가장 완벽한 사랑의 서사라 할  수 있다.

 

기억을 따라 흘러가는 이야기의 결

 

『사랑의 역사』는 단순한 로맨스 소설이 아니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사랑'이라는 감정이 사람의 기억 속에서 어떻게 각인되고, 재해석되며, 결국 삶의 일부로 자리 잡는지를 섬세하게 탐색한다. 작가는 세 명의 화자를 통해 사랑과 상실, 그리고 글쓰기라는 행위가 어떻게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화자들은 서로 다른 시대와 공간에 살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마치 하나의 긴 실타래처럼 얽히고 얽혀 있다.

특히 기억의 단편들이 어떻게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그 단편들이 어떻게 이야기로 재구성되는지에 대한 서술은 인상적이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어느새 현실과 허구,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이 경계 흐림은 마치 꿈속을 걷는 듯한 인상을 주며, 문학이 지닌 시간과 존재에 대한 탐구 가능성을 되새기게 만든다.

 

언어, 그리고 침묵의 미학

 

이 소설에서 언어는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상처를 덮고, 사랑을 숨기며, 때로는 진실을 가리는 베일이 된다. 소설 속 주요 인물인 레오 구어스키는 폴란드 출신의 노년 유태인 작가로, 전쟁과 망명을 겪으며 언어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는다. 그의 일기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존재 증명의 방식이자 사랑을 복원하려는 시도이다.

반면, 청소년 루시의 시점에서는 언어의 공백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침묵 속에서 감정을 해석하려 한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본질에는 공통된 갈망이 있다. 누군가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 자신을 이해받고 싶은 욕구다. 그리고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드러난다.

 

책 속의 책, 이야기 속의 이야기

 

이 작품의 가장 흥미로운 구조적 장치는 ‘책 속의 책’이라는 메타 서사이다. 소설 안에는 또 다른 책 『사랑의 역사』가 등장하며, 그것이 화자들의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 이중적 구조는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의 진실성과 허구성을 동시에 인식하게 만든다. 작가는 이 장치를 통해 우리가 믿는 이야기란 결국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는 허구일 수도 있음을 조심스럽게 암시한다.

또한, 이 소설은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정체성, 전쟁이 남긴 상흔, 문화 간의 단절 같은 무거운 주제들을 서정적 문체 속에 녹여낸다. 인물들의 사연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어서, 독자들은 각기 다른 지점에서 공감하게 된다. 이처럼 『사랑의 역사』는 단순히 줄거리 중심의 소설이 아니라, 깊은 사유를 요구하는 문학적 텍스트로 읽힌다.

 

 

 

『사랑의 역사』는 한 번 읽고 덮기엔 아쉬운 책이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는 선명하지 않게 마무리되며, 그 여백 속에서 독자는 스스로 생각을 채워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사랑의 역사’를 되돌아보게 된다. 이 소설은 이야기의 힘을 믿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특히 언어의 아름다움, 기억의 무게, 사랑의 본질에 대해 감동을 준다.

 

 

새겨진 문장

_p. 96

그녀의 키스는 그가 평생에 걸쳐 대답하고 싶은 질문이었다.

 

_p. 97

의도적으로 분열을 심어놓고 서로에게 다가가는 기쁨을 느끼며 그 분열을 극복할 수 있게 한 세상에 감사했다. 비록 마음 깊은 곳에서는 넘어설 수 없는 차이로 인한 슬픔을 결코 잊을 수 없을지라도.

 

_p. 258

저는 굳이 작별인사도 하지 않았어요. 더 믿기 쉬운 쪽을 믿기로 한 거예요. 그러나, 엄마는 오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저는 제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았던 엄마의 마음을 너무 늦게 헤아렸다는 죄책감을 견디며 살았어요. 프리치를 잃었어요. 프리치는 빌나에서 공부하고 있었거든요.(중략) 사리와 한 나를 개들이게 잃었어요. 허셜을 비 때문에 일었어요. 요세프를 시간의 틈에서 일었어요. 웃음소리를 일었어요. 신발 한 켤레를 잃었어요. 허셜이 준 신발을 자면서 벗어두었는데 일어나 보니 사라지고 없었고, 며칠을 맨발로 걷다가 결국 무너져 다른 사람 신발을 훔치고 말았어요. 사랑하고 싶었던 유일한 여인을 잃었어요. 세월을 잃었어요. 책들을 잃었어요. 그리고 아이작을 잃었어요. 그러니 제가 그사이 언제인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정신마저 잃지 않았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요? 내 책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곳에 나의 흔적은, 나 자신을 제외하면, 전혀 없었다.

 

_p. 340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때가 있었고, 내 인생에 대해 생각한 때도 있었다. 최소한 삶을 꾸리기는 했다. 어떤 종류의 삶? 그냥 삶. 나는 살았다. 쉽지는 않았다. 그렇긴 하지만. 절대로 견딜 수 없는 것이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_p. 360

그녀는 내 기억과 달라 보였다. 그렇긴 하지만, 같았다. 눈, 그 눈을 보고 그녀를 알아보았다. 나는 생각했다. 천사는 바로 이렇게 오는구나. 그녀가 나를 가장 사랑했던 나이에 멈춰진 모습으로.

 

_p. 367

나는 말했다. 미안해. 제일 좋았던 부분이 어디인지 말해봐. '유리의 시대'는 어땠어? 널 웃게 해주고 싶었어. 그녀의 눈이 커졌다.

또 울게도 해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