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 사랑이 아닌 '사랑'의 얼굴을 한 기억

by vaminglibrary 2025. 5. 16.
반응형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 민음사

 

 

작가 소개 :  침묵과 집착의 언어를 쓰는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 1914~1996)는 프랑스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인도차이나에서 태어나 식민지와 여성, 기억과 사랑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을 글로 풀어낸 그녀는 [모데라토 칸타빌레], [히로시마 내 사랑], 그리고 [연인]등 수많은 작품을 통해 독특하고도 집요한 문체로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글은 절제되어 있으나 그 절제 속에 감정의 소용돌이가 깃들어 있으며, [연인]은 그런 뒤라스 문학의 정점이라 말할 수 있다.

 

사랑이 아닌 '사랑'의 얼굴을 한 기억

[연인]은 단순한 러브스토리가 아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감정의 한계, 욕망의 결핍, 그리고 기억의 잔향에 관한 문학적 탐사이다. 작품은 노년의 여성 화자가 자신의 열다섯 살 시절, 베트남의 식민지 도시 사이공에서 경험한 한 중국인 남자와의 사랑을 회상하는 구조로 쓰여졌다. 그러나 이 회상은 단순히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지나온 삶 전체를 되짚어 해체하며, 천천히 그 안에 남은 감각과 침묵을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이 사랑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연애가 아니다. 둘 사이에는 나이 차이가 있었고,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격차는 넘을 수 없는 경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육체를 통해 감정에 접근하고, 감정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려 시도한다. 이때 사랑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서로의 결핍을 확인하는 도구인 것이다.

 

글쓰기, 기억을 휘감는 침묵의 방식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문체는 매우 아름답고 독특하다. 그녀는 종종 문장을 단절시키며, 반복과 생략을 통해 독특한 감정의 리듬을 만든다. [연인]역시 그러하다. 명확한 서사나 풀롯이 존재하기보다는, 짧은 기억의 편린들이 흩뿌려져 있다. 그것들은 겉보기엔 단절되어 있으나, 그 밑바닥에는 깊은 감정의 강이 흐르고 있다. 독자는 어느 순간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내면으로 흘러들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뒤라스는 사실을 묘사하기보다, 감정을 환기시킨다. 그 감정은 종종 명확히 말로 표현되지 않으며, 오히려 말해지지 않은 것들, 즉 침묵의 틈에서 아주 강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글쓰기 방식은 기억의 본질과도 맞닿아 있다. 인간의 기억은 일관되지 않으며, 정확하지도 않다. 기억은 감정의 농도에 따라 왜곡되고,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얼굴로 바뀌기도 한다. [연인]은 그런 유동적인 기억을 언어로 옮기는 시도이며, 그 시도는 완벽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욱 진실하다.

 

여성, 식민지, 신체 - 복합적 층위의 사랑

[연인]의 배경은 1920~30년대 프랑스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현재의 베트남이다. 이곳은 단지 공간적 배경에 머무르지 않고, 이야기의 흐름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정치적・문화적 맥락을 제공한다. 작중 화자는 가난한 프랑스계 여성이고, 그녀의 상대는 부유한 중국인 남성이다. 이러한 인물 설정은 단순히 연애의 비극성을 넘어서, 식민지 시대의 권력관계와 인종적 위계, 젠더의 억압까지 교차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여기서 여성의 신체는 그 자체로 권력의 장이 된다. 화자의 젊고 가난한 신체는 사랑과 욕망, 타인의 시선, 계급의 경계선 위에서 끊임없이 대상화된다. 그러나 뒤라스는 그 신체를 수동적인 희생의 상징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신체를 통해 세상과 접촉하고, 신체의 감각을 통해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어낸다. 이 지점에서 [연인]은 여성 서사로서도, 식민지 비평으로서도 읽힌다.

 

사랑의 이름으로, 끝내 말하지 못한 것들

이 소설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것은 아마도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나서야 화자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듣게 된다. 하지만 이 고백은 이미 너무 늦은 시점에서 전해지며, 두 사람은 각자의 시간 속에서 이미 다른 삶을 살아간 후였다. 이 장면은 '지금-여기'에서 이뤄지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회상 속에만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주 잘 보여준다. 사랑은 말해지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뒤라스는 그 반대를 말한다. 사랑은 말하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으며, 오히려 말해지지 않았기에 더 강렬히, 오래도록  남을 수 있다고. [연인]은 바로 그 '말해지지 않은 사랑'의 잔해 위에 세워진 작품이다. 우리는 그 사랑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완성된 이야기보다 더 오랫동안 그 여운에 붙잡히게 된다.

 

사랑에 대한 소설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들에 대한 소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연인]을 통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의 정의를 해체하고, 그 감정의 본질을 마주하게 한다. 그녀는 사랑을 극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제된 언어, 단편적인 기억, 무심한 듯한 문장으로 감정을 묘사하면서, 그 안에 숨겨진 강렬한 진동을 전달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문장과 문장 사이의 틈을, 말과 말 사이의 침묵을, 감정과 감정 사이의 부유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된다. 결국 [연인]은 사랑에 대해 쓴 책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들-침묵, 후회, 부재, 그리고 잊지 못하는 기억들-에 대한 책이다. 천천히 읽어가며 뒤라스의 리듬과 침묵의 의미를 느껴보길 바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