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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싯 몸 [인생의 베일] : 작가 소개 및 줄거리, 서평

by vaminglibrary 2025.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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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싯 몸 [인생의 베일] / 민음사

 

작가 소개 및 작품 개요

서머싯 몸(W. Somerset Maugham, 1874~1965)은 영국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산문가로, 인간 내면의 이중성과 도덕적 아이러니를 탁월하게 묘사한 작품들로 잘 알려져 있다. [달과 6펜스], [인간의 굴레], [연극 이야기] 등에서 그는 한결같이 삶의 모순, 욕망과 체념, 타인과의 거리감을 탐구해 왔다. [인생의 베일]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1925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중국을 배경으로 외과의사와 윌터와 그의 아내 키티,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인간관계의 갈등과 화해를 다룬다. 표면적으로는 불륜과 복수, 감정의 복잡한 실타래가 얽힌 서사이지만, 실상은 인간이 어떻게 타인을 이해하고, 스스로를 다시 빚어가는지에 대한 과정이다.

 

사랑도 복수도 아닌 이해의 여정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 소설이 단순한 남녀 관계의 도덕적 함정이나 비극적 사랑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끝까지 다 읽고 나서 내 마음에 남은 건 '이해'라는 단어 하나였다. 키티라는 인물은 처음부터 그리 호감이 가지는 않았다. 허영심 많고 철없으며, 오직 자신에게 관심을 주는 남자만을 향해 마음이 움직이는 인물. 윌터는 그 반대다. 내성적이고 도덕적이며, 직업에 헌신적인 남자. 하지만 그 조차도 인간적인 결함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들의 결혼은 시작부터 균열을 내포하고 있었고, 키티의 외도는 결국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는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 흔들림을 통해 파국으로 가는 대신, 독특한 방향으로 서사를 밀고 나간다. 키티는 윌터의 복수처럼 보이는 조치-콜레라 창궐 지역으로의 동행을 통해-점차 다른 감정의 층위에 도달하게 된다. 고통스러운 환경, 죽음을 마주하는 타인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고요한 봉사. 키티는 그곳에서 무언가에 '감염'된다. 그것은 죄책감도 아니고, 단순한 회한도 아니다. 나는 그걸 '서서히 눈을 뜨는 과정'이라고 느꼈다. 인생이란 누구나 어딘가에서 시력을 잃고 걷고 있지만, 때때로 한 줄기 빛에 의해 잠시나마 시야가 열리는 순간이 있다. 키티에게는 그것이 바로 그곳, 그 황량한 중국 지방이었다.

 

침묵의 인물, 윌터에 대하여

윌터는 말이 적다. 겉으로는 조용하고 고상하지만, 내면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고집스럽다. 키티의 외도를 알게 된 후, 그는 직접적인 분노 대신, 그녀를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데려가 자신과 함께 있게 만든다. 이 장면은 윌터라는 인물이 얼마나 감정을 눌러서 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윌터 역시 선한 인물은 아니다. 그는 사랑보다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남자이고, 그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감정의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바우만이 말한 '도덕적 고립 상태'가 떠올랐다. 이 남자는 올바르게 살려고 하지만, 그 올바름이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원칙에 집착한 결과라는 느낌이 강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불완전한'남자의 죽음이 키티에게 새로운 눈을 준다. 윌터가 죽고 나서야 키티는 그를 이해하게 되고, 더 나아가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이는 너무도 인간적인 서사다. 우리는 늘 그렇게 뒤늦게 알아차린다. 곁에 있는 사람의 가치를, 그가 사라진 후에야.

 

중국이라는 배경, 혹은 '타자의 세계'

소설의 배경이 중국이라는 점은 단지 이국적인 설정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구 중심의 사고를 가진 인물들을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한다. 키티는 처음엔 이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곳은 더럽고, 혼란스럽고, 감정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점점 그녀는 '타인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콜레라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돕는 수녀들과의 교류는 그녀가 스스로를 다시 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다. 나는 이 대목에서 그녀가 단지 '봉사'의 감동에 물든 것이 아니라, 자신민의 기준으로 세상을 해석하던 시선이 조정되는 경험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누구를 이해하게 되는 진짜 순간, 즉 나의 좌표를 바꾸지 않으면 상대를 볼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죽음과 재구성-종말이 아닌 기원

서사의 마지막은 예상과는 다르게 잔잔하다. 키티는 다시 돌아오고, 삶을 새로 시작하려 한다. 그 변화는 격정적인 반성이 아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시작된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 존재하지 않으며, 또 누군가를 붙잡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흘려보내지도 않는다. 특히 그녀가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 아이를 품겠다고 결심하는 장면은 어떤 면에서는 해방의 선언처럼 느껴졌다. 사랑의 상처, 결혼의 실패, 죽음의 목격. 이 모든 것을 통과한 후에야 사람은 자신 안의 침묵과 손잡는다. 키티가 그 지점에 도달했을 때, 나는 이 소설이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느꼈다.

 

베일은 찢어지지 않고, 조금 걷어질 뿐

[인생의 베일]이라는 제목은 처음엔 매우 시적이지만 모호하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책을 덮는 순간, 나는 그 베일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인간은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를 반쯤 가려진 채 바라본다. 그러나 아주 가끔, 삶의 극한 지점에서, 그 베일은 살짝 걷힌다.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타인에게 도달하는 유일한 찰나이다. 이 책은 그 찰나를 다룬다. 키티가 윌터를, 자신을, 세상을 잠시나마 제대로 바라보게 되는 순간들. 서머싯 몸은 거기서 멈춘다. 그는 계몽도, 구원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이 얼마나 우회적으로 변하고, 우연처럼 각성하는지를 보여준다. [인생의 베일]은 그리 크지 않은 이야기 속에 한 사람의 윤리적 재탄생과 감정의 진화를 담은 소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를 끝내 이해하게 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방식의 이야기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때로는 타인을 이해하는 일이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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