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신유진 작가를 알게 된 것은 번역자의 글을 소개해주는 유튜브에서이다. 아니 에르노의 책을 번역한 번역가로서의 신유진의 글귀가 책 보다 더 와닿아 그녀의 책이 궁금해졌다. 마침 신간이 나와 얼른 구매해 읽게 되었다. 그녀의 에세이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훈련과 기술이 아닌 성장의 영역에서 바라보았다.
사랑을 '연습'한다는 것의 의미
책 제목은 처음엔 다소 어색하게 다가왔다. 사랑을 '연습'한다고? 사랑은 본능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그 어색함은 점차 이해로 바뀌었다. 이 책은 사랑을 ‘배우는 과정’으로,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실패하고 반복하면서 익혀가는 감정의 언어로 설명한다. 신유진 작가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연애의 감정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주고받는 모든 형태의 ‘사랑’을 포괄한다. 부모와 자식, 친구, 연인, 오래된 관계 속에서의 거리감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랑이 등장하며, 그 관계들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서툴렀고, 때론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를 찬찬히 짚어간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한다고. 그러니 ‘연습’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 문장은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남았고, 책을 덮은 후에도 오래도록 생각을 머물게 했다.
감정을 관찰하고, 되짚어보는 일
『사랑을 연습한 시간』의 가장 큰 미덕은 솔직함이다. 저자는 감정을 꾸미지 않는다. 때로는 스스로를 반성하고, 때로는 상처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감상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단순한 위로의 문장이 아닌, 읽는 이로 하여금 자기감정을 ‘직면’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책은 깊이 있는 에세이로 느껴진다.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 중 하나는, 관계에서 멀어지는 감정에 대한 서술이었다. 저자는 ‘사랑이 사라지는 순간’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 순간을 받아들이는 용기, 그리고 그 안에서도 스스로를 지켜내는 법을 이야기하는 문장들은 일상에서 무뎌졌던 감정의 결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또한, 이 책은 마치 작고 조용한 거울 같다. 내 경험과 감정을 비추어보게 만든다. 어느새 나도, 내 안의 오래된 사랑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이 책은 감정을 휘몰아치는 대신, 그 감정을 찬찬히 관찰하게 해주는 조용한 텍스트다.
문장보다 여운이 오래 남는 책
형식적으로는 짧은 에세이들이 모여 한 권을 이루고 있지만, 각각의 글들은 독립된 이야기로도, 전체적 흐름으로도 무리 없이 이어진다. 글의 구조는 단정하고, 문장은 군더더기 없이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그 단정함 속에서 결코 감정이 배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절제된 문장 덕분에 독자는 자기감정을 채워 넣을 공간을 얻게 된다. 또한, 이 책은 특별히 어떤 결론을 내리려 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렇다, 혹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일방적 정의 대신, 다양한 경험을 통해 사랑을 다각도로 보여준다. 이 점에서, 독자가 자신의 해석을 자연스럽게 개입할 수 있다는 여지가 생기고, 그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자 매력이라고 느꼈다.
조용한 위로와 성찰
『사랑을 연습한 시간』은 감정을 쉽게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을 무겁게 들여다보게 만든다. 어떤 사랑은 끝났고, 어떤 사랑은 진행 중이며, 어떤 사랑은 시작도 못한 채 마음속 어딘가에 머무른다. 이 책은 그 모든 사랑을 조용히 끌어안는다.
취미로 책을 읽는 독서가의 입장에서, 이 책은 단지 따뜻한 글이 아니라, 감정의 체계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하나의 기회였다. 관계에 지치거나, 사랑을 대하는 자신의 방식에 의문이 든다면 이 책은 충분히 성찰의 시간을 선물해줄 것이다.
새겨진 문장
_p. 24
엄마는 말헀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이야기는 별거 아니야. 사는 게 별것이 아닌데 당연하지. 그래도 나는 별거 아닌 것이 별것이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런 이야기가 좋더라. 별거 아닌 걸 말할 줄 아는 용기도."
_p. 45
엄마가 "네 마음은 엄마가 어떻게 해줄 수 없잖아."라고 말했을때, 나는 오히려 엄마가 안쓰러웠다. 엄마의 고단한 삶도 부족해서 내 마음까지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버거울까. 엄마를 생각하면 늘 미안함이 먼저였다. 고마움이 먼저였으면 좋았을 텐데.
_p. 140
"이렇게 검 많은 사람이 어떻게 엄마로 사는지 몰라."
내 말에 엄마가 웃었다.
"엄마가 되는 건 곰이 마늘을 먹고 사람이 되는 것처럼 조금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어."
_p. 173
엄마가 이 글을 읽을까. 읽지 않으면 좋겠다. 언제나 들키는 건 무섭다. 하지만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 아래에는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그 두 마음은 언제나 함께한다. 들키고 싶지 않은, 동시에 알아줬으면 하는 나의 진짜 마음이 있다. 나도 형언할 수 없는 나의 마음을 아마도 엄마는 알고 있을 것이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엄마는 다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진짜마 ㄴ준다. 그것이 엄마의 언어이고, 자존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