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소개 - 결핍과 기호의 언어를 문학으로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 1936~1982)은 프랑스 작가이자 실험적 문한 집단 '울리포(Oulipo)'의 일원으로, 언어의 제약 속에서 새로운 서사를 창조한 이색적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소설, 실험문학, 에세이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어며, 무의 언어, 결핍의 미학, 기억과 일상성에 대한 집요한 탐색을 통해 독자에게 독특한 체험을 선사하였다. [사물들]은 그의 첫 장편소설로, 1965년 르노도 문학상을 수상하며 페렉 문학 세계의 서막을 알렸다.
욕망으로 시작된 이야기 - 그것은 곧 "사물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물들]은 제목 그대로, 사물들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사물'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그것들은 욕망의 매개체이며, 존재의 허기를 포장한 환상의 얼굴들이다. 페렉은 주인공 제롬과 실비를 통해, 1960년대 프랑스 사회의 중산층 청년들이 꿈꾸는 '소유의 풍경'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소설의 첫 문장은 마치 인테리어 잡지의 지면을 옮겨놓은 듯하다. 커튼의 주름, 책장의 질감, 조명기의 곡선, 실내 장식의 색조까지, 모든 것이 상세하게 그려진다. 이로써 독자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라 '사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사물들은 곧 그들이 꿈꾸는 이상적 삶의 알레고리이자,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의 경계선을 형상화한다. 페렉은 물질적 환상에 중독된 한 세대의 초상을 그리며, 단지 욕망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 자체에 소비당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욕망의 끝에는, 항상 허무가 놓여 있다.
삶은 사물을 닮는다 - 현실의 빈자리, 그 안에 가득한 공허
제롬과 실비는 중산층 청년들로, 안락하고 세련된 삶을 원한다. 하지만 그들의 현실은 그러한 욕망을 뒷받침해 줄 만큼의 경제적 기반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조사원이라는 일시적이고 비정규직 직업을 전전하며, 늘 '다음'을 꿈꾼다. 더 넓은 집, 더 부드러운 소파, 더 밝은 조명. 그러나 그 '다음'은 결코 오지 않는다. 이러한 설정은 현대 도시인의 초상을 압축적으로 상징한다. 페렉은 제롬과 실비가 삶을 '사는'것이 아니라 '설계'하고 '구상'하는 데에만 매몰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그들은 마치 현실을 보지 않기 위해 꿈꾸는 사람들처럼, 사물 속에서 자신들의 결핍을 메우려 애쓴다. 이 지점에서 [사물들]은 단순한 시대 풍자에 머물지 않고, 현대인의 정체성과 존재 양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인간은 무엇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는가? 사물은 인간의 도구인가, 아니면 인간이 사물의 피조물인가?
언어의 건축술 - 일상과 의미 사이의 문장들
페렉의 문장은 결코 빠르지 않다. 그는 시간을 늘어뜨리고, 시선을 고정시키며, 사물 하나하나에 그만의 언어를 새긴다. 이 과정은 읽는 이에게 피로를 줄 수 있지만, 동시에 강한 몰입을 유도한다. 그가 묘사하는 사물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처럼 읽힌다. 소파는 욕망이고, 창문은 가능성이며, 조명은 부유한 삶에 대한 갈망이다. 이러한 서술은 문학이 단지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감각과 인식의 재구성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페렉은 구체적이고 시각적인 언어를 통해 일상의 풍경을 해체하고 재조립함으로써, 그 안에 숨어 있던 욕망의 구조를 드러낸다. 또한 [사물들]은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다르지 않는다. 사건은 거의 일어나지 않으며, 인물의 심리 변화조차 뚜렷하지 않다. 그러나 독자는 이 느릿하고 반복적인 문장을 통해, 점점 더 강렬한 정서적 진동을 경험하게 된다. 그 안에서 어떤 진실 - 이를테면, 삶이란 결국 사소한 결핍의 연속이라는 - 이 고요하게 드러난다.
외면과 도피 - 튀니지로의 망명, 그리고 다시 파리로
소설 후반부에서 제롬과 실비는 '변화'를 꿈꾸며 튀니지로 떠난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그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찾지 못한다. 그곳의 사물들은 파리의 사물들과 다르지 않고, 그들의 욕망도 여전히 동일하다. 그들은 다시 파리로 돌아오고, 그 결과로 독자는 알게 된다. 문제는 장소가 아니라 욕망 그 자체였다는 것을. 튀니지는 자유의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공허함을 더욱더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배경일뿐이다. 이 여행은 탈출이 아닌 반복이다. 그들은 여전히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오직 '갖는 법'만을 추구한다. 이러한 결말은 역설적으로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강화한다. 인간은 사물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 하지만, 결국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사물은 삶의 보조물이 아니라, 때로는 삶을 대체해 버리는 덫이 되기도 한다.
사물의 세계, 혹은 현대인의 우울한 자화상
[사물들]은 짧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다. 그것은 1960년대 프랑스의 시대상을 반영하면서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물질 소비 사회의 본질을 날카롭게 꿰뚫는다. 이 책을 덮는 순간, 우리는 한 가지 질문 앞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나의 욕망은 나의 것인가, 아니면 사회가 조장한 모방일 뿐인가?" 조르주 페렉은 사물들을 통해 인간을 그렸고, 침묵을 통해 외침을 남겼으며, 결핍 속에서 삶의 형상을 드러냈다. [사물들]은 문학적 실험이자 철학적 사유이며, 동시에 우리 일상의 정직한 초상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단지 읽히는 책이 아니라,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다. 침묵 속에서 말하는 책, 사물 너머에서 인간을 비추는 거울 같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