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력이 좋은 작가를 오랜만에 만났다
많은 에세이를 읽었지만 가슴 깊게 와닿는 작가는 많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은 달랐다.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는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거칠고, 당혹스럽고, 심지어는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첫 페이지를 펼친 순간, 독자는 곧 알게 된다. 이 작가의 문장은 단순히 거칠기만 한 것이 아니다. 유머와 슬픔, 고통과 희망이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살아 있는 문장’이다. 조승리는 말장난이나 감정 소비에 그치는 많은 에세이 작가들과 달리, 자기 고통을 문학적으로 다루는 데에 탁월한 감각을 지닌 인물이다. 그의 문장은 신랄하지만 깊고, 분노하지만 품위 있으며, 무엇보다 철저히 ‘자기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단 한 문장도 허투루 쓰지 않은 정성과 감정의 농도가 이 책 전체에 진득하게 묻어난다.
시력을 잃고도, 빛을 본 사람의 기록
무엇보다 독자의 마음을 울리는 대목은 조승리가 시력을 상실해가는 과정을 담담히, 그러나 단단히 기록해냈다는 점이다. 시력을 잃는다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삶의 종언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마저 삶의 일부로 껴안는다. 심지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안 보이기 때문에 보게 된 것들이 있다"라고. 시력을 잃어가며 겪은 불안, 분노, 상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세상을 향해 손을 뻗는 그의 태도는 단순한 감동 그 이상의 울림을 준다. 그는 세상을 다시 배워야 했다. 걷는 법, 계단을 오르는 법, 사람을 믿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가는 법’을. 조승리는 그 모든 과정을 날것의 감정으로 기록하되,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끝없이 질문한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이 고통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질문 앞에서 독자는 숙연해지고, 자신의 삶 또한 돌아보게 된다.
고통을 견디는 법, 아니 함께 춤추는 법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고통을 그저 ‘극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승리는 고통을 함께 춤추는 존재로 본다. 그것은 유쾌함과는 다른 종류의 용기이다. 그는 고통을 밀어내지 않고, 끌어안는다. 때로는 농담으로, 때로는 조용한 체념으로, 그리고 때로는 예리한 통찰로.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치유 에세이나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삶에 대해 성찰하게 만드는 한 편의 철학적 텍스트이자, 문학 작품에 가깝다. 비극은 반복되지만, 그는 말한다.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될 수도 있다"라고. 고통의 끝에서 축제를 꿈꾸는 그의 태도는, 읽는 이의 마음에 오랜 파문을 남긴다.
진정성 있는 글이 줄 수 있는 감동
무엇보다 이 책은 ‘잘 쓴 글’이 주는 감동이 무엇인지 다시금 상기시켜준다. SNS에서 소비되는 짧고 가벼운 글들에 익숙해진 독자에게, 이 책은 문장의 밀도와 무게, 그리고 그것이 지닌 정직한 힘을 일깨운다. 조승리의 문장은 쉽지 않지만 결코 어렵지도 않다. 그는 독자를 배려하되, 결코 비위를 맞추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좋은 에세이, 더 나아가 좋은 문학이 지녀야 할 태도일 것이다.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는 단순한 자전적 에세이가 아니다. 삶의 고통을 단단하게 품어 안고, 그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한 인간의 기록이며, 그 과정을 ‘문장’이라는 형식으로 가장 아름답게 증명해 낸 결과물이다. 오랜만에 진짜 글을 읽었다는 만족감과 함께, 이 글을 더 많은 이들이 접했으면 하는 마음이 자연스레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