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소개 : 카를로 로벨리, 과학과 철학의 경계를 허무는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Carlo Rovelli, 1956~)는 단순한 이론물리학자라기보다, 철학자이자 시인, 사상가에 가까운 인물이다. 이탈리아 출신으로, 양자중력 이론, 특히 루프 양자중력 분야에서 선도적인 연구를 이끌고 있으며, 과학의 본질을 대중과 공유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해왔다. 그의 전작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순간의 물리학』 등은 현대물리학의 가장 난해한 주제들을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간결한 문장으로 풀어내며 과학 교양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Helgoland)』는 그런 로벨리의 저작 중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책은 단순히 양자역학이라는 복잡한 이론을 해설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존재와 관계, 현실과 관측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고찰로 나아간다. 그는 과학을 '계산의 도구'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자신을 어떻게 위치 지우는가에 대한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양자역학이라는 신비의 세계, 그리고 헬골란트
책의 시작은 1925년, 북해의 외딴 섬 ‘헬골란트’에서 전개된다. 하이젠베르크가 이곳에서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를 발견하게 된 과정을 로벨리는 마치 한 편의 연극처럼 묘사한다. 바람과 고요, 불면과 혼란이 교차하는 그 고립된 풍경 속에서, 기존의 고전역학으로 설명되지 않던 원자세계의 비밀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로벨리는 하이젠베르크의 발견이 기존의 ‘존재’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뒤흔들었는지를 조심스럽게 설명한다. 양자세계에서 사물은 더 이상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전자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입자’가 아니라, 관측이 이루어지는 맥락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마치 인간관계 속에서만 나라는 존재가 드러나는 것처럼, 양자역학은 존재를 고정된 실체가 아닌, ‘관계 속에서만 정의되는 것’으로 재구성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한참을 멈춰 읽었다. 단순히 물리학적 개념의 전환이라는 차원을 넘어, 이 사유는 곧 인간 존재에 대한 메타포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 자신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독립적이고 확고한 실체인가? 아니면 끊임없이 관계 속에서 구성되고, 변화하는 존재인가?
‘존재란 관계다’ – 양자역학이 삶에 건네는 질문
로벨리는 양자역학의 핵심 사상을 ‘관계적 해석’이라 부른다. 이것은 입자의 속성조차, 그것을 관측하는 대상 없이는 정의될 수 없다는 급진적인 발상이다. 더 이상 세계는 독립된 객체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끝없이 얽히고 연결된 관계의 그물망이다. 이 책의 백미는, 이러한 과학적 해석이 철학과 동양사상, 심지어 불교의 무아(無我) 사상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지점이다. 로벨리는 서양과학의 역사적 궤적 속에서 동양적 사고방식과의 대화를 시도하며, 서구 합리주의가 그동안 무시하거나 회피해 온 관점들을 정면으로 끌어들인다. “나라는 존재는 어디까지가 나인가?” “관계가 없다면 나도 없다”는 불교의 오래된 통찰이, 로벨리의 과학적 논증을 통해 현대적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러한 논의는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고수하는 ‘개인’이나 ‘자아’라는 관념 역시, 실은 끝없이 변화하는 관계와 맥락 속에서 정의되는 것 아닐까? 어느 순간부터 내 감정도, 나의 생각조차도 타인의 시선과 반응에 의해 형태를 달리해 왔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복잡성과 단순함, 그리고 아름다움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매우 복잡한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장은 놀랍도록 명료하고 아름답다. 이는 단순한 글쓰기 기교 때문이 아니다. 로벨리는 진정으로 자신이 이해한 것을 독자에게도 전달하려는 열망으로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는 단 한 문장이라도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개념 하나하나를 이야기로 풀어내고, 추상적 이론과 구체적 비유를 오가며 독자의 사고를 끝까지 이끌어낸다. 그가 과학적 개념을 설명할 때마다 끼워 넣는 문학적 언급, 철학자들의 이름, 그리고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은 이 책을 단순한 과학 교양서가 아닌, 하나의 사유적 에세이로 만들어준다. 특히 “우리는 모두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그것이 진실의 균열이 아니라, 진실의 풍요로움이다”라는 문장은 지금도 내 서재 벽에 적혀 있다.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다
『무엇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순히 물리학의 새 이론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부터 되묻는 책이다. 로벨리는 관측 없는 존재는 없다는 물리학의 명제를 통해, 존재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는 통찰을 건넨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한 가지 오래된 질문에 새로운 답을 얻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 질문에 로벨리는 이렇게 속삭인다. “당신은 당신 혼자가 아니다. 당신은 당신을 바라보는 이들 안에서 존재한다.” 우리는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를 구성하고 있다. 고립된 자아란 없다. 그렇기에 이해는 가능하며, 공감은 유효하며, 연대는 현실이다. 이 책을 덮고 난 후, 나는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그들이야말로 나를 존재하게 하는, 이 세계와 나 사이의 연결 그 자체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