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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앙 보뱅 [지극히 낮으신] : 가난과 겸손

by vaminglibrary 2025.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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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앙 보뱅 지극히 낮으신
크리스티앙 보뱅 [지극히 낮으신]

 

 

 

크리스티앙 보뱅은 말이 아닌 침묵으로, 사상보다는 시선으로 존재를 바라보는 작가였다. 그의 대표작 『지극히 낮으신』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비추는 작은 거울과도 같다. 이 책은 역사적 사실보다는 영혼의 울림을 좇으며, 독자로 하여금 ‘가난’과 ‘겸손’이라는 말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얼마 전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 또한 이 성인의 그림자 아래 있었기에, 이 책을 떠올리며 두 사람의 생애를 오롯이 가슴에 담아 보았다.

 

‘지극히 낮은’ 존재의 고결함

『지극히 낮으신』이라는 제목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자처했던 ‘작은 형제’, 즉 피조물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자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보뱅은 프란치스코를 신화 속 영웅이나 고고한 성인의 틀에 가두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프란치스코가 땅의 냄새를 품은 존재임을 강조한다. 새와 이야기를 나누고, 병든 이를 껴안고, 노래하는 이 ‘미친 자’를 통해 보뱅은 말한다. “성스러움은 높이 있지 않다. 그것은 땅 위에 있다.”

이러한 시선은 교황 프란치스코에게도 이어진다. 교황은 첫 순간부터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택함으로써 세상의 낮은 자들과 함께 걷는 삶을 선언하였다. 검소한 행적, 약자에 대한 무한한 관심, 그리고 권력과 거리를 두려 했던 그의 행보는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현대에 재현한 사례였다. 보뱅의 문장은 그러한 교황의 삶을 더욱 선명하게 되새기게 만든다. 문장 하나하나가 고요한 기도를 닮았다.

 

글을 넘어 존재를 응시하다

 

보뱅의 문장은 설명을 넘어서 존재 자체를 가리킨다. 독자는 문장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 너머의 고요를 경험한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쓰지 않는다. 오히려 한 사람의 ‘빛나는 가난’을 조용히 따라 걸으며, 그의 존재를 오롯이 응시할 뿐이다. 마치 ‘빛이 사물을 드러내듯’ 그의 문장은 대상의 본질을 비춘다. 교황 프란치스코 역시, 말보다 존재로 세상에 응답하고자 했다. 그는 사제직의 권위를 말로 강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족식을 통해, 형제와의 식탁을 통해, 그리고 침묵을 통해 더 많은 말을 남겼다. 그 삶은 보뱅이 사랑했던 ‘말 없는 언어’, ‘존재의 시’와 맞닿아 있다. 이런 점에서 『지극히 낮으신』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에 대한 또 하나의 서평이 될 수 있다.

 

세상의 끝, 사랑의 시작

 

『지극히 낮으신』은 단순한 전기나 종교적 텍스트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방식에 대한 물음이며,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던지는 조용한 질문이다.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높이 오르려는가, 아니면 낮게 엎드리려 하는가? 교황 프란치스코의 선종 소식을 들으며, 많은 이들이 상실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그 자체로 ‘남겨진 기도’이며, 성 프란치스코가 그러했듯 보뱅의 책 또한 후세를 향한 한 편의 기도서다. 거룩함은 광휘가 아니라, 흔적 없이 스며드는 낮음에서 온다. 그리고 그 거룩함은 여전히 책 속에서, 그리고 우리 삶의 어딘가에서 조용히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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