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소개: 기술의 명암을 성찰하는 문화 비평가
크리스틴 로젠(Kristen Rosen)은 미국의 문화 평론가이자 기술사회 비평가로, 인간성과 기술 사이의 경계를 날카롭게 탐구해 온 저자이다. 그녀는 『New Atlantis』, 『The New Republic』, 『Wall Street Journal』 등 다양한 매체에서 글을 기고하며, 기술 진보가 인간의 도덕성과 정체성에 끼치는 영향을 면밀히 분석해 왔다. 특히 로젠은 단순한 기술비판에 그치지 않고, 기억, 경험, 공감 같은 본질적 인간 능력들이 어떻게 기술환경 속에서 변화하거나 소실되는지를 성찰하는 데 집중한다. 『경험의 멸종(The Extinction of Experience)』은 이러한 주제의 연장선상에서, 정보 과잉 시대에 개인이 ‘직접성’과 ‘맥락’을 어떻게 상실해 가는지를 정제된 문체로 담아낸 비판적 에세이다.
줄거리 요약 : 무엇이 우리에게서 '경험'을 빼앗아가는가
『경험의 멸종』은 단일한 서사를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복잡하게 얽힌 현대인의 일상을 해체하고, 그 일상 속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는 ‘경험’이라는 감각적·정서적 실체를 탐색한다. 로젠은 일상 속의 구체적인 사례들, 예를 들어 디지털 기억장치에 의존하는 인간, 자동화된 일상, 가상현실의 침투 등 을 통해, 인간이 더 이상 세상을 ‘몸으로 살아내지 않는다’는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책은 여섯 개의 장으로 나뉘며, 각 장은 경험의 다른 차원을 다룬다. 예컨대, 첫 번째 장에서는 기술을 통한 정보 소비가 어떻게 호기심과 탐색 욕구를 무디게 만드는지를 보여주고, 중반부에 이르러서는 인간관계마저 디지털 필터를 통과하면서 감정의 질감이 어떻게 평준화되는지를 분석한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 저자는 우리가 처한 상황을 "풍경 속에 있지만 결코 그 속을 걷지 않는 존재"로 묘사한다. 이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듣고 접하는 모든 것이 실제의 물성과 감정을 동반하지 않는 상태—즉 '체험되지 않은 체험'이 되어버렸음을 의미한다.
감각의 탈색, 인간의 얕아짐
로젠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경험이 단지 정보의 조합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에 있다. 그녀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인간의 경험이란, 단순히 데이터를 받아들이는 행위가 아니라, 그 안에 감각적 흔적과 시간의 퇴적이 깃든 '살아 있는 인식'이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깊게 와닿았던 부분은 '기억'에 대한 논의였다. 저자는 사람들이 스마트폰, 클라우드, SNS에 기억을 외주화 하면서, 실제 기억의 내면화가 점점 사라진다고 말한다. 나 역시 중요한 일정이나 추억을 사진이나 메모 앱에 저장한 뒤, 그것을 다시 떠올리기보다는 '찾아보기만' 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그런 나의 일상이, 이 책을 읽는 동안 작지만 선명한 위기감으로 다가왔다. 이 책은 감정 없이도 정보를 보관할 수 있는 시대에, 과연 우리가 ‘산다’는 감각을 어떤 방식으로 유지해야 하는지 질문을 던진다. 결국 경험이란 몸으로 겪고 마음으로 소화한 일의 총합인데, 우리는 점차 그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을 얻으려 한다. 로젠은 이것이 바로 경험의 멸종이며, 인간 존재의 평면화라 말한다.
기술 찬양 이후의 진지한 회고
무엇보다 『경험의 멸종』이 돋보이는 점은, 기술 그 자체를 악마화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로젠은 스마트폰을 없애자거나, 인터넷을 끊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의 편리함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인간의 내면과 행동에 어떤 구조적 변화를 야기하는지를 성찰한다. 예컨대, GPS에 의존하면서 길을 잃는 법을 모르게 된 세대, 자동 추천 알고리즘에 따라 선택하는 소비자, SNS 상의 ‘좋아요’ 반응을 실제 관계의 대체물로 여기는 현상은 단순한 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리듬과 감정의 구조가 변형된 증거로 본다. 책을 덮은 후, 나는 ‘얼마나 많은 순간을 내가 직접 겪지 않고 지나쳤는가’를 곱씹게 되었다. 실제로 나는 언제부터인지 비 오는 날의 냄새를 기억하지 못했고, 타인의 표정을 읽는 능력에도 점점 둔감해지고 있었다. 경험이란, 기술이 줄 수 없는 ‘마찰’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깨달았다.
경험은 느리고, 불편하며, 그래서 인간적이다
『경험의 멸종』은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를 묻는 고요한 알람이다. 빠르고 효율적인 삶 속에서 지워져가는 감각의 기록, 타인의 온기, 익숙한 길에서 길을 잃을 자유, 이 모든 것들이 다시금 소중하게 느껴진다. 로젠은 말한다. “경험은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식이다.” 그 말에 동의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삶을 ‘통과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고 싶은 마음을 되찾았다. 느림과 불확실성, 그리고 불편함 속에서야 비로소 경험은 꽃을 피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