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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소년이 온다] : 시민의 이름으로

by vaminglibrary 2025.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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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소년이 온다
한강 [소년이 온다]

 

 

얼마 전, 우리는 말도 안 되는 현실을 마주했다. 뉴스 헤드라인에 박힌 ‘계엄령 검토’라는 단어에 눈을 의심했다. 순간 내가 있는 이 현실이 현실 같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내 손이 간 책이 있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였다. 피 흘리던 1980년 광주, 그 피 위에 선 소년을 기억하려 애썼던 그 소설을, 나는 다시 펼쳤다. 이번엔 취미로 읽는 독서가가 아니라, 분노를 품은 한 시민으로서.

 

소년은 죽었고, 우리는 외면했다

 

『소년이 온다』는 한 문장의 무게로 시작한다. “그해 봄, 사람들은 죽었다.” 죽음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등장한다. 이 소설은 소설이 아니다. 문학이자 증언이며, 역사에 대한 가슴 떨리는 고발이다. 주인공 ‘동호’는 1980년 광주에서 실종자와 시신을 감시하고 정리하는 일을 맡는다. 열다섯,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것을 본 이 소년은, 말 그대로 '역사의 눈'이 된다. 그는 살아남지만, 동시에 죽는다. 그의 시선으로 보는 그 봄날의 광주는 독자의 폐부를 찌른다. 최근의 ‘계엄령’ 검토 소식을 접한 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드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40여 년이 지났지만, 권력의 본성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광장에서 들려오는 분노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 ‘막으려는’ 자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동호가 지키려 했던 것은 단지 주검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통제’라는 이름 아래, 그 존엄을 유예하려 한다.

 

죽음은 기록되고, 기억되어야 한다

 

한강은 『소년이 온다』에서 구체적이고도 고통스러운 묘사로 시신들을 다룬다. 문체는 간결하지만, 감정은 그 어느 작품보다 격렬하다. 그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슬픔과 분노를 감정의 표면에 드러내지 않고, 독자 스스로의 심연을 두드리게 만든다.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은 자들’이다. 하지만 그 생존은 축복이 아닌 형벌에 가깝다. 피해자뿐 아니라 방관자, 가해자,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살아온 이들까지. 이 모두가 ‘국가 폭력’이라는 이름 아래 상처 입은 존재들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계엄령의 그림자도 그렇다. 그것은 단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기억을 지우려는 시도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오늘을 위한 문학이다. 1980년이 아니라, 2025년의 우리를 위한.

 

문학은 저항이 될 수 있을까

 

『소년이 온다』를 덮은 뒤, 나는 오래도록 창밖을 바라보았다. 광주는 멀리 있지만, 동호는 여전히 이 땅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가 마지막으로 본 광장의 이미지를 되새겨야만 한다. 문학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하지만 문학은 세상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쉽게 반복될 수 있는지를 경고한다. 한강의 이 소설은 단지 과거를 기록한 책이 아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느냐고. 계엄령이라는 단어 하나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이 시대. 그 공포를 말로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소년이 온다』는 말한다. 말하지 않으면, 기억하지 않으면, 우리는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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