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작품 세계를 오래도록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그녀가 침묵과 고요 속에 숨겨진 감정을 어떻게 다루는지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채식주의자』나 『소년이 온다』처럼, 고통과 상처를 생생하면서도 절제된 언어로 그려내는 데 탁월한 그녀는 이번 『희랍어 시간』에서 또 다른 결을 보여준다. 바로 언어 자체가 존재를 매개하는 방식, 혹은 언어 이전의 감각을 감히 문장으로 번역해 내는 시도이다. 이 소설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언어와 상실, 그리고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인물들은 파편화된 삶 속에서 각자의 고요한 세계를 구축하고, 독자는 그들의 ‘희랍어’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어간다. 작중 화자인 여성은 삶의 균열과 상실을 희랍어 수업이라는 틀 안에서 조심스레 다독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언어 학습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불러내고, 고통을 복기하고, 끝내는 인간 존재의 깊이를 응시하는 과정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언어를 붙잡는 사람들
이야기 속 두 인물, ‘그녀’와 ‘그’는 서로를 향해 다가서지만 결코 완전히 맞닿지 않는다. 이 거리는 한강의 문체가 가장 잘 드러나는 지점이며, 바로 이 불완전함이 소설의 아름다움이다. 두 인물 모두 감정의 직접적 표현을 삼가며, 언어를 매개로 서로를 이해하려 애쓴다. 특히 희랍어라는 낯선 언어는, 우리가 흔히 감정을 전달하는 도구인 모국어의 습관을 걷어낸 채, 보다 맑은 방식으로 인간의 내면을 직시하게 만든다. ‘그녀’가 희랍어 단어 하나하나를 음미하고, 때로는 발음의 울림을 통해 감정을 새기려 하는 장면들은 단순히 언어학적 탐구를 넘어선다. 그것은 절실함의 표현이자, 존재를 잇는 마지막 끈이다. 말하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은 감정들을, 그 단어들 속에 꾹꾹 눌러 담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는 인간 존재의 슬프도록 고요한 존엄을 보았다.
가장 아름다운 한강
많은 이들이 한강의 최고작으로 『채식주의자』 혹은 『소년이 온다』를 언급하지만, 나에게 있어 『희랍어 시간』은 그녀의 작품 중 가장 아름다운 글이다. 이 작품에는 폭력적 현실의 외면도, 사회 구조에 대한 급진적 저항도 없다. 대신 인물들의 내면에서 조용히 타오르는 언어와 감정의 불꽃이 있을 뿐이다. 문장이 때로는 시처럼 느껴지고, 구절 하나하나가 정적 속에 울린다. 그래서 난 이 책이 한강의 책 중 가장 아름답다 생각한다. 독자로서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무수히 멈추어야 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그 여운이 가라앉을 때까지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그것은 마치 일상의 시간 속에 잠시 희랍어로 호흡하는 경험이었다. 일상과는 다른 질감, 다른 온도의 감정들이 내 안에 머무는 시간이었다.
문장을 넘어, 삶을 새기는 이야기
『희랍어 시간』은 말의 힘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동시에 언어 이전의 감정,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미세한 울림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는지를 조용히 보여준다. 나는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일상 속 대화의 무게와, 우리가 나누는 단어 하나하나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되새기게 되었다. 말로 다 표현되지 않는 감정들, 그리고 그런 감정들을 붙잡고자 애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을 것이다. 한강은 『희랍어 시간』에서 그 조용한 흐름에 귀 기울이는 법을, 독자에게 속삭이듯 가르쳐준다. 그것이 이 작품이 지닌 가장 진한 힘이며, 내가 이 소설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