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성적순일까?
문학동네에서 매달 리커버돼서 나오는 먼슬리 클래식을 기다리는 즐거움이 있다. 언제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달에만 한정판으로 구매가 가능해 소장가치가 더 높다. 이번에 나온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는 읽어보려 리스트업 해놨던 책이라 더욱더 반가웠다.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모범적인 학생으로,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다. 그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장학생이 되어 기숙학교에 들어간다. 많은 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길이다. 하지만 소설은 이 “성공한 아이”의 삶이 진짜 행복한지, 진짜 그 아이에게 맞는 삶인지 묻는다. 한스는 매일 치열한 공부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좋은 성적과 칭찬을 목표로 살아간다. 주변 어른들은 그런 그를 자랑스러워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점점 한스를 짓누르기 시작한다.
성실함만으로는 살 수 없는 세상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한스는 점점 무기력해진다. 공부는 여전히 잘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텅 비어 있다. 그가 원래 좋아했던 자연과 강, 그리고 친구들과의 한가로운 시간이 사라지고 나니, 그의 세계는 너무 좁고 답답해졌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한스가 자연 속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부분이다. 잠깐이지만 그는 자유로움을 느끼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현실은 다시 그를 공부와 경쟁의 세계로 끌어당긴다. 결국 한스는 너무 많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그는 ‘수레바퀴 아래서’ 깔려버린 것이다. 이 수레바퀴는 단순히 한스 개인의 불행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시의 교육제도, 어른들의 가치관, 사회 전체가 만든 무거운 압력의 상징이다. 작가는 이 수레바퀴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짓누르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 이야기
『수레바퀴 아래서』는 100년 전에 쓰인 책이지만, 지금 읽어도 여전히 유효하다. 오히려 오늘날 청소년의 현실과 더 닮아 있다. 요즘 아이들 역시 어릴 적부터 공부와 입시, 경쟁 속에서 자신을 잃고 있는 경우가 많다. 부모와 선생님은 좋은 성적을 위해 힘내라고 하지만, 정작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는 외면하는 경우도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한스 같은 아이가 지금 우리 옆에 있다면, 우리는 그를 어떻게 대할까? 여전히 공부만 시키고, 감정은 참고, 경쟁에서 이기라고 말할까? 아니면 잠깐 멈춰 서서 “너는 지금 괜찮니?”라고 물어볼 수 있을까? 이런 말이 있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한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 그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그 동네가 한 아이를 망칠 수도 있다고 말이다.
헤르만 헤세는 이 작품을 통해 단순히 한 아이의 불행한 삶을 그린 것이 아니다. 그는 그 시대,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는 사회의 문제를 조용하지만 깊이 있게 지적한다. 문장이 어렵지 않지만, 문장 속에 담긴 생각은 오래도록 남는다. 고전이란, 어쩌면 바로 이런 책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새겨진 문장
_p. 109
하일너가 그의 배반에 대한 아픔과 분노를 싣고 멀리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듯했다. 성적과 시험과 성공이 아니라 양심이 깨끗한지 더러운지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다른 세상 말이다.
_p. 119
"그럼, 그래야지. 친구, 아무튼 지치면 안 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고 말 테니까."
_p. 152
나무를 배면 뿌리 근처에서 종종 새싹이 움터나오듯이 한창때 병들고 상한 영혼 역시 새로 시작하는 꿈 많은 봄날 같은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간다. 마치 그곳에서 새 희망을 찾고 끊어진 삶의 끈을 새로 이을 수 있다는 듯이. 뿌리에서 움튼 새싹은 빠르게 쑥쑥 잘 자라지만 그것이 찾은 건 가짜 생명이고 다시는 제대로 된 나무가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