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아버지가 툭 던지듯 권해준 책. 취향이 서로 달라 권해주는 책은 잘 안 읽는데, 이 책은 왠지 모르게 손이 가서 읽게 되었다. 신경외과 의사 헨리 마시는 『참 괜찮은 죽음』에서 병원이라는 밀폐된 공간, 수술실이라는 비밀스러운 무대 뒤편을 조용히 열어 보인다. 그가 의사로서 수십 년간 겪어온 수많은 죽음들, 실패한 수술, 가족의 고통, 환자의 고집, 때로는 자신의 자만심과 실수까지도 숨김없이 드러낸다.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의사의 언어’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고백을 듣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솔직하고 겸허한 서술 방식이다. 의사라는 직업은 종종 절대적인 권위와 판단을 상징하지만, 헨리 마시는 오히려 그 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완벽한 판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환자들의 생사 앞에서 끝없이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이 책은 단순한 의학 에세이가 아니다. 살아 있다는 것, 고통 속에서도 끝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끝이 반드시 비극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조용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
의학과 인간성 사이에서 균형 잡기
헨리 마시는 환자들의 뇌를 다루는 외과의사이지만, 이 책에서 그는 뇌를 수술하는 것만큼 마음을 다루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의학적 판단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는 순간들, 환자와 가족의 바람과 현실 사이에서의 간극, 그리고 의료 시스템의 한계와 비합리성을 날카롭게 짚는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수술로 삶이 연장될 수 있음에도 그 결과가 회복 불가능한 장애를 남길 수 있음을 설명하면서, 수술을 강요하지 않고 판단을 환자에게 넘기는 장면이다. 그는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음에도, 그것이 곧 환자에게도 최선이 될 수는 없음을 이해한다. 그런 고민 속에서 그는 오만이 아닌 겸손을, 판단이 아닌 공감을 선택한다.
이런 태도는 현대 의학이 놓치기 쉬운 ‘인간성’이라는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첨단 의료 기술과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정작 필요한 것은 ‘죽음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진솔한 성찰일지도 모른다.
'괜찮은 죽음'이라는 새로운 기준
‘괜찮은 죽음’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 책은 그 물음에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보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각기 다른 답을 모색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가 만난 수많은 환자들은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정리하고 죽음을 맞는다. 누군가는 단호하게 수술을 거부하고, 또 다른 이는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다.
마시는 이 모든 선택을 존중하며, 자신의 판단을 절대시하지 않는다. 그 겸허함이 이 책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죽음 앞에서 ‘참 괜찮다’는 표현이 얼마나 많은 감정과 태도를 담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단순히 고통 없이 편안히 맞이하는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와 존엄을 지키며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는 과정 자체가 ‘괜찮음’의 조건이 된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삶을 연장하는 기술보다도 죽음을 준비하는 태도가 더욱 중요할 수 있음을 조용히 일러준다. 특히 의사라는 입장에서 그 태도를 직접 실천하고자 하는 그의 자세는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마치며
『참 괜찮은 죽음』은 죽음에 대해 말하지만, 실은 삶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책이다. 환자와 의사, 삶과 죽음, 판단과 책임 사이에서 고민하는 헨리 마시의 고백은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마지막에 괜찮은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 답은 책 속에 명확히 적혀 있지 않다. 다만 책장을 덮는 순간, 우리는 이전보다 조금 더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게 된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새겨진 문장
_p. 174
온전하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확률이 거의 없다면 과연 수술로 목숨만 살려 놓는 것이 그 환자를 위한 길인지 의문이 점점 커진다. 인간의 존엄성이 사라진 삶을 살 바에는 평화롭게 죽는 게 더 나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보다 더 기꺼이 받아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_p. 196
조그만 방을 나와 어두운 병원 복도를 걸어가며 다시 한 번, 인간은 어째서 삶에 그토록 간절히 매달리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지 않으면 훨씬 덜 고통스러울 텐데. 희망 없는 삶은 가뭇없이 힘든 법이지만 생애 끝에서는 희망이 너무도 쉽게 우리 모두를 바보로 만들 수 있는데.
_p. 275
순간적으로 소멸하는 죽음을 끝내 이루지 못한다면 내 삶을 돌아보며 한마디는 남기고 싶다. 그 한마디가 고운 말이 되었으면 하기에, 지금의 삶을 후회 없이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 의식을 차렸다 잃었다 하는 동안 모국어인 독일어로 이렇게 되뇌셨다. "멋진 삶이었어. 우리는 할 일을 다했어."